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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 마지아 수녀님
댓글 0건 조회 15,833회 작성일 11-11-2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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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에 하느님 찾기

 

Jerome Kodell, O.S.B

 

 

몇 해 전 미국의 어느 주요 대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강의하는 어떤 교수가 학생들에게 시편으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기도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너무 쉬워서 우리 집 강아지에게까지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지요하자 학생들은 아주 재미있게 듣기 시작했다. 그 교수는 자기 말을 입증하기 위해 학생 대표 몇 명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는 강아지를 응접실로 부르더니 주머니에서 고기를 싼 뭉치를 꺼내서 포장을 벗기어 그 강아지 머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그 강아지는 뒷발로 서서 고기 덩어리를 향해 앞발을 들고 얼마 동안 있었다. “보시다시피 강아지도 기도할 수 있죠?”하고 교수가 말하자, “, 청원기도만 하고 있네요하고 학생대표들이 대답하였다. “바로 그것이죠라고 그 교수는 응수하였다.

 

 

1. 청원하는 기도

 

청원하는 것도 기도이며구하라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도 있느니 만치 구하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로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이 기도는 공통분모가 가장 낮다.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간에 누구든지 구하는 기도를 한다. 불행이 닥치거나 장래가 불투명할 때 제일 먼저 자연스레 나오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때나,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또는 자연재해를 당할 때 기도한다.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을 때, 시험을 치를 때, 저절로 흘러나오는 이 기도는 카드놀이, 운동경기 또는 경마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도라고 하면 청원기도를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에는 구하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이 있다. 청원기도는 유치원생의 기도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기도에 흠숭, 회개, 감사와 탄원이 포함된다고 가르친다. 탄원은 청원기도의 구성 요소로서, 네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의 모든 요소를 이해하고 융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전통적 기도는 무엇보다도 미사이며 기도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전례를 거행하면서 배운다. 더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의 모든 요소를 융합하는 법을 배우며 기도에 나아가면 갈수록 덜 이기적이 되므로 점차 높은 단계의 기도 즉 흠숭이나 감사의 기도를 더 많이 바치게 된다.

 


2. 수도승생활과 기도


수도승생활은 기도의 생활이다. 수도승생활로 불리움은 다른 모든 불리움과 같이 하느님을 친밀하게 알고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려는 갈망으로 시작된다. 이 불리움에 초점을 맞추어 나감에 따라 기도에 진보할 수 있도록 의미 있게 짜여진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향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이 수도생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근본적인 장애는 아마도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기도에 대한 편협한 개념일 것이다. 만일 기도가 다만 청하는 것, 요청과 응답, 시작하고 그치는 것이며, 단면적이고 지성적이며 경험적인 것일 따름이라면, 기도 생활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수도승생활은 영적 세계에 대한 다른 이해를 증거한다. 수도승생활은 더 풍요롭고 더 심오한 수준에서 실재 내면에 사는 모험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교회의 대학자들이나 기도의 스승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동방 수도승들에게처럼 영적 세계란 현실 뒤에 숨겨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진실과 허상을 포함한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참된 현실 세계였다. 수도승생활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욱 깊이 일치함으로써 하느님의 이 현실 세계에 뿌리를 박는다. 이 부르심은 기도의 섬김이다. 기도하는 사명을 따라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위한 은총의 통로가 된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의 1984년 워싱톤 강론에 나는 크게 감동한 바 있다. 그는 고통받고 있는 남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준 전세계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였다.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은총의 사례들 중 그가 든 한 예는, 고문으로 격렬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한 정치범이 그 고문하는 사람이 사랑에 굶주린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 것이다. “그런 은총의 경지로 들어가도록 여러분이 기도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투투 대주교는 반문했다.

 

이런 인식에서 놀라워할 점은 하느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남아프리카를 위하여 기도한 것이나 기도할 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 준 것만을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욱 심오하게 연결시켰던 것이다.

 

가끔 여러분은 기도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너무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마음은 황량하고 하느님은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실하기 때문에주님, 기도하고 싶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분심과 싸우더라도 이 30분을 주님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또한 여러분이 기도에 매우 충실하였기에 남아프리카의 어떤 이가 갑자기 특별한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으나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 믿는 이들이 바치는 개인기도와 남아프리카에서 받은 은총의 선물 사이에는, 그저 청하고 받는 것보다 더 깊은 연관성이 있다. 공동기도이든 개인기도이든, 소리를 내서 하든, 침묵으로 하든, 관상기도이든 모든 기도는 강생의 신비 때문에 중재하는 기도이다. 구원은 이미 왔고, 우리와 같이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도록 허락하신 모형인 것이다.

 

수도승생활은 교회에 대한 이러한 통찰에 초점을 맞추고 응결된다. 누구든지 직접 구원하실 수 있고 항상 자유로이 관여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그물로 엮으시기를 선택하셨으므로,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축복이 흘러간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더욱 더 내어놓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축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도록 불리웠다. 이것이 기도의 역할이다. “하느님 은총의 섭리 안에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이를 때까지 결코 알지 못할 어떤 사람과 하느님의 선물을 나누고 있을지 모른다고 토마스 머튼은 썼다.

 


3. 내면의 지성소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내 인격의 중심, 밀실로, 내 마음으로 그분이 나를 초대하실 때에는 세상과 세상의 필요는 아주 멀리 사라지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순간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현재이다. 모든 피조물을 존재케 하시는 하느님이 내 마음에 계신다. 이 내면의 지성소에서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거룩하신 하느님 현존에 애틋한 신뢰로써 나 자신을 열 때, 나는 온 세상과 세상의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필요를 보살필 수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어느 하나라도 전혀 보살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살필 수 있으시다.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서, 사람을 도구로 선택하신 것이야말로 강생의 신비이다. 하느님 친히 의도하신 대로 하느님은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고, 나 자신을 선물로 드리고, 하느님의 신비에 자신을 열어놓는 나를 필요로 하신다. 나는 침묵의 기도 중에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아무 조건 없이 온통 내어 맡긴다. 이 순간에 나는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 가운데 형성된 유대로 말미암아 또한 나는 온통 그들을 위하여 존재하기도 한다. 나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연대감으로 손을 뻗친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나를 통하여 하느님이 일하실 때 아주 손쉽게 쓰실 수 있도록 나를 거기 내어놓는다.

 

할 수 있는 한 나는 내가 아는 필요들을 명백히 하고, 내가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도움을 청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나는 내 기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표현할 줄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하느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나의 정확함이 아니라 나의 신앙과 그분이 쓰실 수 있게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영원히 모든 사람의 구원의 샘인 까닭에,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방법으로 나도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닿을 은총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에서 저자는 수도승 생활의 전통에 대한 이러한 확신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성실한 기도와 침묵은 알지도 못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돕는다”(3). “하느님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 그 자체가 당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더욱 가치가 있으며 하느님과 모든 성인들을 더욱 찬양하는 것이며 당신의 성장에 더욱 유익하고 살아있는 이나 죽은 당신의 친구들에게 더욱 도움이 된다”(9). 이 전통은 󰡔명상의 새 씨앗󰡕(New Seeds of Contemplation [새 명상의 씨]: 가톨릭출판사, 1996)에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이 쓴 그 유명한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진정한 관상가들은 세상의 힘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의 감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주가 멸망하지 않도록 지켜 주기 때문이며, 그들이 작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런데도 온 세상이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생활의 역할은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며 현대 교회에서도 그다지 이해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수도승생활을 사회에 봉사하는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그들은 수도승생활이 기도를 위해 짜여진 삶이며, 양호실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질적으로 작아질 때 마음으로써 세상을 이긴다(1요한 5,4). 자신이 작아짐으로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오랜 기도와 신뢰로써 세상을 위해 은총의 투명한 통로가 된다.

 


4.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수도회들이 본래의 영감과 창립자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명하였다. 대부분의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이는 베네딕도 수도승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역사와 전통의 영성을 많이 연구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2차 바티칸공의회의 이 성과는 앞으로 수십 년간 수도승생활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이끌어갈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승생활과 그 방식에 또 다른 영향을 끼쳤다. 많은 이들이 그 영향을 알아보게 되었다. 공의회 직후는 복음의 재발견, 근본으로 돌아감, 교회 쇄신 등, 거대한 흥분의 시기였다. 몇몇 성서적 어휘가 구호처럼 되었고, 샬롬(하늘스런 평화), 케리그마(복음선포), 코이노니아(친교) 등은 원어로 쓰였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돌봄으로써 예수님을 본받기를 크게 강조했다.

 

특별히증인이라는 성서의 한 단어가 60년대 가톨릭교회의 쇄신을 대표하는 것 같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 1,18). ‘증인혹은증거라는 이 단어는 명사나 동사로도 쓰이는데 풍부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60년대의 열광은 한 가지 의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활동으로 특히 복음 선교에서 남을 위한 봉사(이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성서적 권고이다)에 한정시켰다. 이는 좋은 결과 뿐 아니라 나쁜 결과도 냈다.

 

이러한 관념이 나타나자, 보이는 봉사는 보이지 않는 봉사보다 더 나은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증거를 하니까’). 교회 안에서 관상 수도회의 지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왜 관상 수도자들은 공적인 증거와 하느님나라를 위한 봉사를 하지 않는가? 어떤 사도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일이 곧 기도라고 했다. 세속 도시의 시대였다. 도시에는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요청하는 더 많은 문제와 더 많은 사람이 나타났다. 도시에서, 특별히 도시 한가운데 빈민가에서 증거하는 것이 더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공동체를 도시로 옮기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더 잘 응답하는 것이라는 관념마저 떠돌았다.

 

70년대 초까지 하나의 반응이 정착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매력은 오직 사회봉사라는 측면으로만 한정되었고 놀라운 신세계는 전보다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긍정적인 면이라면 창립자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라는 공의회의 요구에 응답한 수도회들이 탁월한 기도의 전통을 되찾는 은혜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성령은사쇄신운동의 출현은 개인 영성과 기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60년대의 공적 증거와 70년대의 개인 영성은 점차로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활동을 알맞게 결합시켜 나가고 있다. 관상 수도회에 관한 문제는 다시 유보되었다.

 


5. 성소의 감소


교회 내 성소 부족으로 말미암아 그 문제가 다시 표면에 떠올랐다. 이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좋다고 치더라도 사도직 활동까지 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엄격한 관상 수도회 뿐 아니라, 모든 수도승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서방 수도승 생활의 대부분이 활동과 관상을 혼합하는 특성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이에 해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 수도자들이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다면, 왜 좀 더 많이, 아니면 공동체 회원 전부가 활동 사도직에 종사하지 않는가?

 

우리의 대답은 교회가 우리에게 원하고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내 수도생활은 복된 전통과 거룩한 영감으로 짠 여러 가지 색깔의 예복과 같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 각 지체의 고유한 은사가 필요한 것처럼 교회는 각 수도회의 독특한 영성의 은사가 필요하다. 만일 한 수도회가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 생명의 풍요로움을 일부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수도승생활에 기대하는 고유한 선물은 무엇인가? 수도승생활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을 서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생활은 그리스도교에 본질적인 것이다. 수도승생활의 공헌은 기도의 중요성을 지켜 가기 위해 짜여진 삶을 살면서 기도에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단 하나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즉 기도와 공동체 생활로 하느님을 찾음으로써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봉쇄 수도자의 주요 임무는 지존하신 하느님께 수도원에서 겸손하고 고귀한 봉사를 바치는 것이다”(수도생활에 관한 교령 9)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는 수도승들이 수도원 밖에서는 활동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교회가 이러한 부르심에 기대하는 근본적인 것은 성실한 수도생활로서, 사도직과 교회에 은총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사명이 절충되어서는 안 된다. 봉쇄 수도회들은교회의 탁월한 선에 기여하는 그 생활양식을 충실히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회에 적합한 사도직의 요청과 조화하도록 하여야 한다”(수도생활에 관한 교령 9).

 

교회는 여러 대륙에서의 선교 활동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 성 프란치스꼬 하비에르와 가르멜 수도원의 봉쇄구역 안에 머물었던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두 분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함으로 활동과 관상이 서로 보충한다는 것을 표현한 바 있다.

 

앞으로 수도승생활의 기본 역할은 교회가 기도에 더 깊이 초점을 맞추도록 도울 것이라. 수도생활에서 사도직은 그 자체로서 항상 중요한 것이겠으나, 그것이 성직자와 수도자의 표지처럼,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 전체의 표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수도승들은 항상 행하여 온 것처럼 기도하고 일하면서 봉사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 중에 하느님 찾기를 새롭게 강조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서는 보이는 활동이 하느님의 숨겨진 활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관념을 수정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 사명은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18세기 지성의 깨달음 이상의 것을, 21세기의 정신으로 깨닫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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