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의오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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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귀동 할아버지
충북 음성군 금왕읍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돌아와보니 집안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고 몸은 병들어 무극천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되었습니다. 그후 40여 년 동안 남는 밥만 얻어다가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피며 살았습니다.
1986년 2월 15일 ’작은 예수라’는 칭호를 들으며 ’한국가톨릭대상’ 사랑부문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 집지어주라"는 말과 함께 부상으로 받은 상금 120만 원을 내놓아 12억 원이 들어가는 노인요양원을 건립하게 하였습니다.
이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할아버지는 1990년 1월 4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온 나라 매스컴이 보도하고, 수십만 꽃동네회원과 꽃동네가족·봉사자·수도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5일장을 치른 후 꽃동네 입구 양지바른 언덕에 모셨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께서 보내주신 조의금으로는 비석을 세웠고, 꽃동네회원님의 조의금으로는 할아버지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오웅진 신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꿈과 결심을 가지고 천주교 사제가 되었습니다(1976. 5. 3).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는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하였습니다.해질 무렵, 성당 앞을 지나가는 걸인 최귀동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뒤를 따라가게 된 신부님은 성당 뒤 용담산 기슭에 있는 움막 속에서 동냥도 못 나가고 사는 걸인들에게 자신이 얻어온 밥을 먹여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1976. 9. 12). 신부님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하며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튿날 주머니돈 1300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를 구입한 신부님은 무극성당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시멘트 블록을 찍기 시작, 마침내 용담산 기슭에 방 다섯 칸 부엌 다섯 칸짜리 시멘트 블록집(사랑의집)을 짓고 무극천 다리 밑에 살던 걸인 18명을 맞아들였습니다(1976. 11. 15). 꽃동네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꽃동네 이야기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꽃동네를 찾아오는 걸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꽃동네를 돕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그 가운데 일생동안 사랑과 봉사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젊은이들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수도공동체인 예수의꽃동네형제회, 예수의꽃동네자매회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980년 9월 29일 청주교구 사제총회는 꽃동네 설립을 가결하였고, 이후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분들을 맞이할 수 있는 시설이 한 동, 한 동 늘어났습니다.
이어 1981년 예수부활대축일을 기해 한 달에 1000원 이상 회비를 내는 꽃동네회원을 전국적으로 모집하기 시작하여 꽃동네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986년 12월 27일 당시 청주교구 교구장 정진석 주교의 승인으로 예수의꽃동네형제회와 예수의꽃동네자매회가 창설되어 끊임없는 사랑의 삶을 일구어가고 있습니다.
꽃동네가 살아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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