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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꽃동네 예수님을 통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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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 마지아 수녀님
댓글 0건 조회 12,158회 작성일 11-06-02 04:38

본문

성령 세미나 2주차 전 수녀님께서 강의 하셨던 내용입니다.

제2주 예수님을 통한 구원

구약은 그 자체가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읽으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난을 겪을 때 결코 모른체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 탄원하고 간청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탄원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 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이어가심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신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무한하여 그 무엇으로도 막거나 끊을 수 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의 숨결, 생명에서 나온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다가 하느님(인간생명의 근원)께로 되돌아가야할 존재, 즉 피조물 중에 가장 귀중한 존재이다.

창세기에 보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장소, 당신께서 몸소 다스릴 장소로 좋게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감탄 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5번/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1번)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왜 이세상은 험난하기만 하며, 개개인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가?

- 이 세상 악의 세력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유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우리의 생활 방향을 하느님께로 전환해야 합 니다.

- 하느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이 세상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사회도 개인도 잘못된 점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와 풍요한 생활, 행복한 생활을 위해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그분은 아직도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문제들 죽음, 전쟁, 가난, 범죄, 경제적인 불안정, 가정의 불화, 인간관계의 복잡성, 세대차이, 에너지, 오염으로 인한 자연재해 등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악의 세력을 동반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사회 문제는 날로 악화되어 청소년들의 범죄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문제와 구제책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고독, 고립, 우울감, 근심, 불안감, 무의미한 생활, 공포, 의혹, 불신, 나쁜 대인관계 등 많은 문제들로 괴로워하고 있다.

사회악과 이 모든 문제들은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근본적으로 치유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새 생활을 찾기 위해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현대문명과 사람들의 많은 노력에도 현대의 고도화된 물질문명, 산업사회의 발달은 오히려 공해와 비인간화를, 생명의 경시풍조를 개인주의와 윤리도덕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물론, 풍요로운 삶과 편리한 삶을 가져다 주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참된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직면하는 모든 문제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종교를 선택하였다.

종교를 통하여 행복한 생활 찾고 세상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을 해 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접근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또한 자기만의 하느님상을 만들기도 합니다.(도덕, 철학, 종교, 약, 선, 요가, 뉴에이지 등을 통하여)

현대문명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느냐 라는 문제는 긍정적 답변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현대문명의 공헌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표현이 아니라 현대 문명이 지향하는 가치관의 잘못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들 공해, 사고, 인구문제, 자원고갈, 식량부족, 전쟁, 빈부격차, 상호불신풍조, 소외현상, 개인이 직면하는 위기인 교육문제, 직업, 빚, 이별, 질병 등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문제를 인간들의 노력으로 치유 할 수 있는가?

우리들은 이 모든 문제들이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발생할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는 사람들이 해결할수 없는 악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퍼지는 죄의 힘(로마3:9-23)은 막기 힘들다. 악의 세력(세상, 탐욕, 사탄 등) 은 어두움을 동반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1요한 2:18-27)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죄란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며, 하느님에 대해 능동적으로나 수동적으로 반항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과 하느님과의 절교는 인간끼리의 절교를 초래했다.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로 알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온갖 부정과 탐욕과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로마 1장>

그래서 하느님만이 이룰 수 있는 영신적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는 인간은 사랑과 평화 속에 함께 살 수 없다.

사람들은 참 평화, 정의, 진실을 달성하는 데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도록 창조되었다. 오직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능하다. 하느님 안에서 변화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어두움의 지배하에 살든지 하느님의 나라에 살든지 간에...

하느님은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서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아들의 죽음과 부

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시다. 하느님은 우리를 어두움과 사탄으로부터 해방시키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들의 영혼을 구하셨다. 영혼은 하느님을 모신 그릇이다.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통교하며 친교를 맺게 되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린다 해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불안과 걱정 등으로 방황하고 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혼의 평화를 가져다주심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자유인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 악의 세력의 종노릇을 하며 그것에 억매여 있다.

탐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생명을 걸고 투쟁하게 하며, 불행을 가져다 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은 우리 영혼을 살리고 참된 자유인으로 소생시켜 준다. 십자가의 성혈로써 참된 자유인이 된다.

참된 자유인이란 탐욕, 죄, 삶의 불안과 공포, 죽음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모든 인간들에게 참된 평화, 사랑, 기쁨과 행복을 주시려고, 우리들의 환경을 가치관을 변화시키려고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고통의 생활을 구원하여 영혼의 평화를 주신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구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함이며, 우리가 회개하고 신앙을 갖는 것도 구원받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죄와 죄의 형벌에서, 악의 세력으로부터,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구원이란 천당 가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역시 전적으로 새로운 풍요의 생활이다

참된 평화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구원의 완성이다. 십자가는 구원의 표상이며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 자신의 구원 메시지와 그에 상응하는 사랑의 실천행위였던 것이다.

이 고난과 죽음은 고통과 불의로 가득찬 인간역사 속에서 구원 메시지와 사랑의 실천행위가 무조건적임을 시사하는 표징이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고난이 인간들이 범한 죄의 결과인가 또는 무고한 고난인가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성부로부터 받은 소명에 자유롭게 충실하여 인간들을 남김없이 사랑했고, 소외된 세계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자신을 동일시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자유롭게 포착했던 예수는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죽음과도 화해한 것이다. 그의 순종적인 사랑의 행위가 십자가에서 최종완성에 이른 것이다. 성부께 대한 순명과 인간을 위한 봉사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데서 그의 구속행위는 성취되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인간을 아집에 사로잡히게 하고 인간적 안전장치에 사로잡히게 하는 속박이 분쇄되었다. 여기서 사랑이 죽음의 위협과 공포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활신앙은, 자기 생명의 운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삶은 곧 “구원된다”는 희망적인 신앙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 죽음마저 수락했던 예수의 자유는 부활과 함께 완성된 모습을 드러냈다. 한계를 모르는 사랑에 자유가 구원의 실재임이 드러났다.

그리스도 신앙의 올바른 구원관 안에서 구원의 개인주의란 있을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이 온갖 질곡과 멸망의 생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붸르너 뤼크(W. Ruck)는 오늘날 일상적인 체험 속에서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원이란?

병자는 치유됨을, 굶주리는 자는 한 줌의 쌀이나 한 조각의 빵을 받음을,

고독한 사람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을 찾음을,

수인은 감옥으로부터 해방됨을,

반겨주는 이 없는 사람은 이해와 호감을 받음을

억압받고 예속된 사람은 타율적인 처지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함을,

부당하게 취급되는 사람은 법과 정의가 관철한다는 체험을,

일상과업의 단조로움에 시달리는 삶은 실적의 강압없이 그리고 다가오는 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그리고 다가오는 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고향으로부터 추방된 사람은 고향을 되찾음을,

전쟁과 폭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찾고,

절망하고 체념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으며,

헤어날 길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충고를 하고 새로운 길을 탸개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원기대‘나 또 다른 ’구원기대‘들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사로잡히게 하고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씨앗의 형태로나마 채워질 수 있다.

역사는 인간의 구원이 결정되는 장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적 상황에 무관할 수 없다. 교회는 신앙의 빛과 힘으로써 소외된 처지를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임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기본인권이 유린될 때에 침묵을 지킬 수 없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인간의 구원자>라는 회칙에서 명언하듯, 정신과 말과 사랑의 무기 이외의 다른 무기를 소유하지 않는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를 계속한다. “살인하지 마시오, 인간의 파멸을 준비하지 마시오, 기아와 비참에 시달리는 당신의 형제와 자매들을 생각하시오, 각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시오”라고...

예수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 부활은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에 참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작위로 인류를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세주는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의로운 자를 뽑으시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그들을 통하여 악한 자를 벌할 심판자로서 드러나신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인류의 현세적인 해방자인 동시에 종말론 심판자이시다.

아무리 하느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해도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구원은 오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발로 하느님의 구원을 찾고자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

구원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늘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의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기도가 구원의 절대적이고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현세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맛볼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하느님의 나라, 흔히들 말하는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1. 성체성사는 밥과 같다.(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내어주며 우리더러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를 건네주며 우리더러 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몸을 내주고 피를 쏟아 죽어가고, 그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산다.

2. 성체성사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 가운데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당신을 기억한다면 제자들도 당신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비록 당신처럼 살면 당신처럼 죽게 될 것이나(어둠을 밝히려면, 짠맛을 내려면 초와 소금은 녹아야만 하므로) 바로 그 희생과 죽음이야말로 세상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기쁜 소식이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완결임을 마지막으로 호소하시는 것이다.

3. 성체성사는 사랑과 정의의 절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으실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살리시고자 당신 살과 피를 건네주셨듯이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세상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자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교회의 성찬례는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따위를 그리스도와 결합 시킨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행할 것은 예수님의 삶이며, 예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자기 비움이다.

성체성사의 기본은 먹고 마시는 일, 즉 식사의 형태이다. 빵을 떼어 나누어 먹고 포도주 잔을 나누어 마시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우리 일치하는 것이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자기희생의 삶, 자기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서의 성찬례는 사랑의 “새 계명”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음식을 바꾸면 체질이 변한다고 한다. 마음을 다하여 영성체를 자주 하다 보면 우리의 영적인 체질도 변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예수 마음이 되고 구원은 온전히 보장된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닮을 수가 없으므로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성령의 의미를 새겨 봄으로써 보다 확연해질 것이다. 성령이란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숨결, 곧 인간 안에 살아 숨쉬는 하느님의 생명이니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생명을 모독하는 짓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다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며 특히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구원받고 완성될 인간의 생명이란 더욱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니 그러한 생명을 모독하는 짓이란 얼마나 큰 죄가 될 것인가. 그런데 이 시대야말로 생명의 죄가 ’세상의 죄’라 할만큼 뿌리 깊고도 광범위하게 만연되어져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생명의 가치와 질을 떨어뜨려 생명을 생명답지 않게 만들어 사회 전반을 황폐화시키는 비인간적이고도 반생명적인 죄악들하며, 모두를 비정상적으로 몰아 넣는 이기주의의 장벽에 의해 빚어진 계층 지역 간 갈등 및 온갖 소외증후군의 병폐들, 특히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모태에서 자행되고 있는 태아살해(낙태)에 의한 산아제한과 같은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죄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 사회는 생명이 그 존립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인간의 탐욕은 기어이 자연까지 오염시켜 생태계를 뒤틀리게 하고 환경파탄을 초래하고 있으니, 과연 예언자 호세아의 절규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가.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땅은 통곡하고 온 주민은 생기를 잃어 간다.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마저 죽어 간다"(호세 4,2-3).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이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 생명을 가져다주려 몸소 오시는 하느님,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거부하고서 오히려 하느님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만을 위하려는 그릇된 사랑, 곧 생명의 고유원리인 공동체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면서까지 본 모습마저 상실한 채 자신과 세상 심지어는 우주적 질서까지 병들게 만든 인간. 생명체인 인간이 생명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배척하는 자가당착 속에서 어찌 생명이 온전케 될 수 있으랴. 신이 죽었다’고 외치는 그 순간 인간도 함께 죽어 버린 것이다.

사실 인간의 죽음은 영혼의 죽음이다.

이 시대의 비인간화도 우리 사회의 반영성적 흐름을 반증해 줄 따름이다. 그리하여 원초적 회귀가 요구된다. 가치관의 재정립이야말로 생명수호의 첩경인 까닭이다.

참됨을 잃어버려 텅비어버린 우리 중심에 하느님의 자리를 다시 마련함으로써 생명의 보금자리도 마련되어지고 또한 우리의 생명도 온전케 될 수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길이 생명의 길이요 동시에 인간의 길인 것이다.

참으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갈라 5,25)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내 몸과 같이 생명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력에 의해 자신과 이웃 모든 피조물과의 원죄적 부조화에서 해방되어져,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여 모두가 한 가족 되는 성령의 일치를 이루게도 될 것이다.

물질주의의 가라지가 무성하기만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 하나 하나는 생명의 밀알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성의 밀을 심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생명을 지키고 키우고 살리며 우리 사회를 생명 지향의 인간화된 복음적 공동체로 새롭게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본죄

- 본죄는 계명을 알고도 자유로 범하는 것입니다.

- 본죄는 특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범하게 됩니다.

- 본죄는 대죄와 소죄 두 가지 있습니다.

- 대죄는 계명이 중한 줄 알고도 온전한 자유로 범하는 것입니다.

- 대죄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은총과 모든 공로를 다 잃고, 지옥의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계속하여 자의나 타의나 대죄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고 지옥의 벌을 받게 되고, 그런 요소에 다가갈 힘을 갖게 되는 것이 소죄의 역할입니다.  길에 비유하면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는데, 방해되어 돌아가게 하거나 지체하게 만드는 큰 돌을 대죄라고 한다면, 그런 역할까지는 아니지만 가는 길을 불편하게 하는 자갈돌들은 소죄정도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소죄는 계명이 중대치 않은 줄로 알고 자유로 범하는 것입니다.

- 소죄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점점 줄어들어 차차 대죄에까지 빠지게 되기 쉽고 또한 현세의 고통과 후세의 연옥의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원죄(原罪)

원죄는 내가 행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의지도 없었고, 나는 참여하고 싶었다는 것과도 전혀 상관없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 원조 아담의 죄와 벌이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모든 인류가 원조의 후손으로서 원죄에 물들어 있으니 이것을 원죄라 합니다.

- 모든 사람이 다 모태에서부터 원죄가 있으며, 성모 마리아만이 원죄가 없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원죄의 모습은 하느님의 명(命)을 어긴 것으로 우리의 본성에 달라붙은 죄악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에덴동산을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다스리게 하십니다(창세기 2,15). 그러면서 그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 보통과는 다른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막아더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2,16-17).

 

  "왜 먹지도 못하게 하는 나무를 동산에 만드셨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질문일 뿐입니다. 아담은 그런 불만 섞인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그 명령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처음에는 말이죠. 왜 아담은 우리가 요즘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아담의 말과 생각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가 그 생각을 추측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입장이라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떻게 항변하시겠습니까? 왜 그렇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는가 탓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응답은 뒤로 접어두고라도, 하느님의 슬픔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기껏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제대로 다스리라고 능력을 주어 파견했더니, 알량한 자유의지로 내 속마음을 후벼 파?" 그냥 놔둘 수가 없죠.  그러나 참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흙으로 만든 그릇에 해당하는 인간을 통하여 그래도 뭔가 하실 일이 있으셨기에 그러셨을 것입니다.

 신약성서 고린토 후서 4,7에 보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속에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고 전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는 보화를 담아주셨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신약성서 로마서 4,20-21에 보면,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 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도 못했던 세상 최초의 인간들이 저질렀다는 ’원죄(原罪)’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우리 모습, 우리 삶에 남아있는 그 찌꺼기들을 어떻게 하면, 치워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신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예수의 공로를 미리 입으사, 미리 보호를 받게 되신 것이니, 이 특은을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 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원죄 중에 그냥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무한하신 자비로써 즉시 구세주를 허락하시고 후에 과연 보내셨습니다.

 

신앙과 믿음은 논리(論理)로 해설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켜서 ’원죄’라고 합니다.

  

  - 성모마리아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류의 구원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역할을 인간세계에 하신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을 통하여 세상의 창조주요, 최고 관리자로서 우리가 굳이 구별하자면 성부로 부르는 하느님이 의도하신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업적은, 최초의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멸망의 길로 나아갔던 것에 비해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순종으로서 하느님의 아프신 마음을 위로해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죄악의 근원을 찾는 것은 신비한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위에서는 사람이 갖는 욕심이 죄를 있게 하는 원인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기에서는 그런 죄악의 근원을 말합니다.

- 모든 죄악의 근원은 대개 일곱 가지를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을 가리켜 ’칠죄종(七罪宗)이라고 합니다. 죄종(罪宗)이라는 개념은 자체로 죄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죄의 근원도 되고, 동시에 다른 죄를 유발하는 원인도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최근에 교황청 내사원에서 신(新) 칠죄종에 대해 언급하면서 ‘환경 파괴,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 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세포 연구, 마약 거래,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모을축 財-재물재), 낙태, 소아 성애(性愛)’를 지적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지만, 그 위험성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시기적절한 예언자적 외침이라 하겠다.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7가지 현대의 악덕들을 신 칠죄종이란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죄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초등학교 시절에 ‘7’에 관련되어 암기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학교에서는 일곱 가지 무지개 색인 ‘빨주노초파남보’가 있었고, 주일학교에서는 ‘칠성사’가 그 중요도에 있어서 단연 필수 암기 내용 1순위였다. 하지만 교리 시험의 변별력과 관련되어 암기해야 할 것으로 칠죄종(七罪宗)을 빼놓을 수 없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교오, 간린, 미색, 분노, 탐도, 질투, 해태’를 생소하지만 지금도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수없이 반복해서 암기했음이 분명하다. 칠죄종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다

 

이런 것들을 ‘죄의 종(宗)’이라고 한 것은 그 죄에서 다른 죄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만에서 이기주의, 불순종과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칠죄종은 일종의 ‘악한 습관’으로 보아야 한다.

죄는 죄로 이끌며, 같은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 악습을 낳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삶의 일부분처럼 되어 버린 악습 때문에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양심의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

비만인 사람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체중이 늘어버리고, 그 과도한 체중 때문에 질병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태생적으로 안고 살고 있다.

누구나 조심하지 않으면 죄에 떨어지고, 그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자아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칠죄종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칠죄종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일곱 가지 덕이 있는데 ‘현명, 정의, 용기, 절제’라고 하는 사추덕(四樞德)과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향주덕(向主德)이다.

 

덕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몸에 밴 확고한 마음가짐이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인 반복 훈련을 통해 익힌 좋은 습관이다. 덕을 갖추기까지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일단 몸에 익힌 좋은 습관은 악습이 우리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칠죄종을 물리치게 된다.

 

칠죄종이라는 사악한 적들은 조금만 방심하고 있어도 우리 안에 수많은 유사한 적들을 양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다.

개인적인 윤리 생활과 직결된 전통적인 칠죄종이건 아니면 최근에 교황청에서 제시한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의 신 칠죄종이건, ‘현명, 정의, 용기, 절제, 믿음, 희망, 사랑’이라고 하는 일곱 가지 덕을 통해 완벽하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1) 마르 7,21-22; 로마 1,29-31; 1고린 6,9-10; 갈라 5,19-21; 1디모 1,9-10; 2디모 3,2-5 참조.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 같은 것들입니다"(마르 7,21-22). "육의 행실들은 명백합니다. 음행, 부정,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샘, 분노, 모략, 불목, 분열, 질투, 주정, 폭음폭식, 그밖에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짓들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19-21)

1. 교만

교만(=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하고, 오만(=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나 행동으로 겸손과 반대된다. 교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언행이 마치 모든 것의 척도이자 법法이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창세 3,5 '하느님처럼').

교만은 일곱 죄종 중에서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든 죄악의 뿌리이고 자만, 허영, 자기 자랑, 과도한 치장, 이유없는 고집, 말다툼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성 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모든 죄의 근원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죄의 시작이 곧 원죄요, 원죄의 내용은 교만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에서 인간은 추락했습니다.

 - 남을 비판하지는 않았습니까?

 - 남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까?

 - 윗사람의 말을 잘 들었습니까?

 - 남과 다투지는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교만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고 겸손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교만 때문에 천국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천국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애심(自愛心)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하느님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우정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그분만이 우리 삶의 마지막 목표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2. 인색

하는 짓이 소심하고 인색한 것을 말하며 관대, 자비, 너그러움 등과 반대된다. 간린은 정당한 이유나 목적 없이 세상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 기인하는 것으로 단지 많은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애착이 문제되는 것이다. 인색은 가난한 자에 대한 무감각, 부정축재, 사기 등으로 기울기 쉽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고 재물은 그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물로 인하여 많은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지나친 물질주의에 물들어 있어 재물 그 자체가 마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 돈 때문에 이웃과 서로 다투지는 않았습니까?

 - 불쌍한 형제나 이웃을 외면하지는 않았습니까?

 - 지나친 소비로 재물을 낭비하지는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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