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기도는 자아인식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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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자아인식을 강조한다.
수도승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말하고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고자 한다. 수도승은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자로 하여금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마음의 작업을 하도록 강요하신다는 것을 거듭 체험하곤 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거듭 되돌아보게 하셨는지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내가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얼마나 보기 싫고 불구인지, 더러움과 얼룩과 벌레들로 가득 찼는지를 보도록 나와 대면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랐으며 내게서부터 어디로 도망칠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우리 자신을 피할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도 중에 자신을 회피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도 중에 거듭하여 우리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떠올리게 하고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시며 보여주신다. 닐루스(Nillus)아빠스는 기도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마음을 상해 준 형제에게 대한 원한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기도시간에 네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한 노부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또 우리의 현실과 대결하지 않는 모든 기도는 우리에게 무익하다고 하였다:
“기도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란 마치 허공을 향해 팔을 뻗치는 것과 같다.”
기도가 자아인식을 강요한다는 것은 체험적인 사실이다. 수도승들은 그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사탄은 질투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나쁜 생각들과 격정을 불러 일으켜 기도를 방해한다.”
수도승은 이에 대해 놀라지 말고 그것을 정상으로 여겨야 할 것이며 오히려 에바그리우스(Evagrius)의 말대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여야 한다:
“올바르게 기도하려면 올바르지 않은 것을 각오하며 꿋꿋이 견디어내라.”
생각들과 격정들이 기도하려는 우리를 방해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고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에 대해 작업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성 티에리(Thierry)의 빌헬름(Wilhelm)은 바로 그가 기도를 시작하려 할 때면 생각들이 홍수처럼 밀려옴을 아주 잘 묘사하였다. 그는 경건하게 기도하려고 밀려오는 생각들을 모조건 억누르거나 제거시키지 말고 의식적으로 그쪽으로 향한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만 방해를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 근본을 규명하고자 애쓴다:
“그래서 나는 내 제물을 제대 앞에 둔 채 초조한 마음으로 내 자신과 함께 내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나는 내 자신을 거슬러 하느님의 말씀의 등잔에 불을 댕기고 분노하고 격분한 정신으로 만들어 내 의식의 어둔 곳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내 마음의 빛으로부터 나르르 분리시키는 어둠들이, 역겨운 어둠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끝내 밝혀내려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느새 못된 날파리떼들이 내 눈 안에 날아 들어오고, 그러면 나를 내 자신의 의식의 거처로부터 몰아내는 데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내 마음의 거처로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왜냐하면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 때, 정돈하고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무질서하고 형형색색의 혼잡스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홍수처럼 내게로 덮쳐온다. 그것들은 애초에 마음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마치 내가 그것들을 심판하려고 앉아 있기나 하듯 의자 위에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나는 그것들 각각의 내 마음 안에서의 합당한 자리를 지정해 주기 위해 그 하나하나의 얼굴과 의미를 볼 수 있도록 내 앞에 설 것을 명령한다.”
그는 생각들을 가리웠던 안개가 걷히고 빛이 비추이면 그의 감정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이제 본래의 자리로, 분위기와 감정에로 향한다. 생각들 그 이면에는 감정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선 질투, 분노, 불쾌와 미움이 사랑으로 인해 없어지면 생각들은 고요해지고 마침내 그는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게 된다:
“이젠 모든 어둠이 지나가버렸기에 나는 보다 건강하고 밝은 눈으로 진리의 빛이신 당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는 있습니다. 나는 당신께 더욱 마음을 열고 신뢰하며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의식의 모든 심연을 당신께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수도승은 기도 중에 반사적으로 자기 자신과 함께 작업을 해야 하고 떠오르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자아인식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보다 좋은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자아인식을 통해서 기도를 방해하거나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수도승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도를 방해하는 생각들과 감정들을 간단히 흩어버리거나 억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들을 인정하고 더 깊이 수용할 때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철저히 자신을 관찰하고 자아를 거듭 인식할 때 수도승은 참된 기도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안토니오는 수도승은 자기자신을 필히 알아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우리가 방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기까지 자신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다.”
그레고리오는 베네딕도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그의 마음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지 않게 했다.”
필로칼리에(Philokalie: 예수 기도에 대한 글을 모은 책)는 자기관찰의 목적을 이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주의를 여러분의 생각에로 향하면 향할수록 예수께 대한 불타오르는 갈망과 함께 더욱 열성껏 그에게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아인식은 기도를 위한 조건이다:
그것은 유혹을 낱낱이 알아내고 자기 영혼의 움직임을, 모든 외적 영향들을 주의깊게 지켜보는 것과 같이 기도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생각들과 추구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면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에게 자아인식을 강요한다. 내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 중에 줄곧 분심으로 번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기도 중에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분심들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고대 수도승생활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분심잡념들은 꿈처럼 자아인식을 위해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분심들은 그것들이 암시해 주는 바 때문에 대단히 가치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바에 대해 깨어서 꿈을 꾸는 것과도 같다.”
꿈이 우리 영혼의 심층, 즉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 해명하고 있듯이 무의식 속에서 생겨나는 분심들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들은 마음의 경향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것을, 특정한 사람들을, 사건들을 생각한다면 혹은 언제나 같은 문제들이나 계획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대단히 중대한 역추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보다 잘 알 수 있다면 즉시 분심이 사라지고 하느님께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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